류인학/자유기고가, '문화일보'에 한국의 명산을 답사하며 쓴 글 ‘배달의 산하’, 구도소설 ‘자하도를 찾아서’ 연재
유부자댁은 최부자댁처럼 이백 년 가까이 대대로 유복하게 지내며, 많은 선행으로 덕망이 높았습니다. 유부자댁인 운조루는 고택 명소가 되어 해마다 많은 관람객이 방문하는데 지금도 유씨 가문 종손이 여기서 살고 있습니다.
운조루(雲鳥樓)는 원래 사랑채 당호였는데 지금은 유부자댁 전체를 가리킵니다.
호남지방에는 예로부터 호남 3대 길지로 널리 알려진 양택명당(집터 명당) 세 곳이 있습니다.
담양의 만물시생지, 구례의 금환낙지, 정읍의 평사낙안이 유명한 3대 양택명당입니다. 운조루는 금환낙지에 자리잡았다고 알려진 문화 유씨 가문의 고택입니다. 운조루 터를 호남지방 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고의 양택 명당이라고 극찬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운조루를 세운 이는 낙안군수와 삼수부사를 지낸 유이주 선생입니다.
선생의 고향은 대구입니다. 선생은 본래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는데, 풍수학에도 조예가 깊어 관직에서 물러나면 좋은 길지를 찾아 가솔들과 함께 은거할 뜻이 있었습니다. 선생은 자손들이 세상의 거친 풍파에 휩쓸리지 않고 오래 오래 평화로이 유복하게 살 수 있는 복지를 구하려고 애썼습니다.
당시 경상도 지방에는 좋은 길지에 터를 잡고 수백 년에 걸쳐 자손 대대로 복을 누리는 명문가의 집성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영남지방 4대 명당 길지로 알려진 안동 하회 마을, 안동 내앞 마을, 봉화 닭실 마을, 경주 양동 마을이 가장 유명했습니다.
하회 마을은 풍산 류씨, 내앞 마을은 의성 김씨, 닭실 마을은 안동 권씨, 양동 마을은 월송 손씨와 여강 이씨의 집성촌입니다. 이 가문들은 대대로 큰 복덕과 명예를 누렸고 또, 많은 존경을 받으며 대대로 명문세가의 맥을 이었습니다. 선생은 자신의 가문도 이런 명문가가 되길 바라며 빼어난 명당 길지를 구하려고 노력했을 것입니다.
그런 선생의 마음이 크게 이끌린 곳이 지리산 서쪽 끝자락인 구례군 토지면 일대였습니다. 선생은 먼저 가솔들을 토지면 파도리로 이주시킨 다음 집터를 구했습니다. 당시 운조루터는 선생의 양자인 유덕호 선생의 처가댁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은 뒷산에서 산사태가 날 위험이 있는데다 바위가 많아서 아무도 여기를 좋은 집터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이 터의 진가를 모르고 황무지처럼 방치한 땅이었습니다.
풍수학에 조예가 깊었던 유이주 선생은 이곳이 빼어난 명당 길지임을 알아보고 사돈댁으로부터 이 땅을 매입했습니다. 땅을 구한 뒤, 선생은 감격에 겨워 5촌 조카이자 양자인 유덕호 선생에게 `하늘이 아무도 모르게 숨겨 놓으셨다 나에게 주셨구나` 라고 말했답니다.
옛날부터 토지면에는 뛰어난 명당 세 곳이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옵니다. 그 세 명당은 거북이가 진흙 속으로 들어가는 형국인 금귀몰니형, 선녀가 하늘로 오르다 땅에 떨어뜨린 금가락지 형국인 금환낙지형, 다섯 가지 보석이 모여 있는 오보교취형입니다.
혹자는 운조루 터가 금환낙지형이라 하고, 혹자는 금귀몰니형이라고 합니다.
운조루를 지으려고 터를 닦을 때 땅 속에서 거북이처럼 생긴 돌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운조루 터를 금귀몰니형으로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금귀형은 들판 한가운데나 물가에 있으며, 흡사 거북이처럼 생긴 동산이나 둔덕입니다.
필자의 견해로는 은조루 터를 금귀형으로 보긴 어렵습니다. 금환낙지형이 맞다고 봅니다. 운조루의 주산인 뒷산의 정상 부위엔 금가락지처럼 동그랗게 생긴 봉우리가 있습니다. 또, 운조루에서는 안 보이나 동그란 봉우리 위로는 선녀가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의 산봉우리가 있습니다.
멀리 우리 배달겨레의 성산인 백두산에서부터 힘차게 뻗어온 백두대간은 배달 땅 남녘 끝자락에 크나큰 정기로 지리산을 빚어 올렸습니다. 이 지리산 주능선 서쪽 끝인 노고단에서 산맥 두 개가 갈라져 남쪽으로 뻗어 나왔습니다.
그 중 서쪽 산줄기는 형제봉 월령봉을 솟아 올린 다음, 오미리 들판과 만나는 곳에 운조루 주산을 빚어놓고, 계속 남진하여 섬진강에 이릅니다. 노고단에서 갈라져 나온 또 하나의 산맥은 왕실봉 왕시루봉 등을 빚어 올리며 섬진강에 이릅니다.
이 산줄기가 운조루의 청룡입니다. 운조루 주산을 지나 섬진강까지 뻗어간 산줄기는 백호가 됩니다.
운조루 앞, 청룡과 백호 사이엔 드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습니다. 들판 앞으로는 섬진강이 보입니다. 섬진강은 운조루 앞 들판을 다정하게 감싸주듯 살짝 굽이치며 유유히 흐릅니다.
섬진강 건너편에는 오봉산 다섯 봉우리가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이 오봉산이 운조루의 안산입니다. 오봉산 뒤에는 계족산의 주봉과 지봉들이 높이 솟아있으며, 그 형상이 흡사 장막을 펼쳐 놓은 것 같습니다. 이 계족산이 운조루의 조산입니다.
오봉산과 계족산 오른쪽에는 퉁주리봉과 자래봉이 드높이 솟아있고, 또 그 오른 쪽에는 멀리 별봉산, 봉두산, 갈미봉, 천왕봉 등이 보입니다. 오봉산과 계족산 왼쪽에는 백운산의 여러 산줄기와 봉우리들이 겹겹이 늘어서 있습니다.
운조루에서 사방 어디를 둘러봐도 공허하게 비어있는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수많은 산줄기와 산봉우리들이 병풍을 둘러친 듯 운조루를 감싸고 바람을 막아줍니다. 게다가 그 많은 산 중에 흉하게 생긴 산이 하나도 없습니다. 거의 모든 산들이 단아하고 수려하게 생겼습니다.
운조루처럼 많은 산에 둘러싸인 터에 흉하게 생긴 산이 안 보이는 곳은 매우 드뭅니다. 참으로 귀한 복지 중의 복지입니다. 이런 복지는 특별한 덕을 쌓은 사람이라야 얻을 수 있습니다. 재산이 많다고 아무나 쉽게 차지할 수 있는 터가 아닙니다.
뒤에 더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유이주 선생은 인품이 고매하고 많은 덕을 베푼 분이라 이 터와 인연이 닿았던 것입니다.
운조루의 주산은 정상 부분엔 동그란 금성의 작은 봉우리 두 개가 있고 약간 아래 부분은 토성, 목성, 금성이 합쳐진 형태입니다. 주산이 이런 형상인 터에서는 부유하면서도 지혜롭고 후덕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안산인 오봉산에는 작은 노적 같은 봉우리 다섯 개와 창고처럼 생긴 봉우리가 나란히 있습니다. 오봉산 오른쪽, 섬진강 강물이 흘러오는 입구에 솟아오른 자래봉도 거대한 노적처럼 생겼습니다.
오봉산 왼쪽, 강물이 흘러나가는 출구에도 거대한 노적처럼 생긴 봉우리가 우람한 자태로 높이 솟아있습니다. 운조루 왼쪽 청룡에도 거대한 노적봉이 있는데 이 봉우리가 가장 가까이 있는 노적봉입니다. 오른쪽 백호에는 창고처럼 생긴 봉우리가 있습니다.
이렇게 노적봉과 창고 형상의 봉우리들이 사방을 호위하고, 섬진강이 다정하게 보호해주니 대부호가 나올 곳입니다. 또, 그 복덕이 오래 유지될 명당입니다. 게다가 사방의 산세가 수려하여 재물로 덕을 베풀어 많은 사랑을 받게 되는 정말 귀한 복지입니다.
운조루 바로 앞에는 농수로가 지나갑니다. 바깥채에서 불과 6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데, 문수골 계곡에서 흘러온 맑은 물이 사시사철 동쪽에서 서쪽으로 운조루 앞을 가로질러 흐릅니다.
이 물의 좋은 기운이 또 운조루에 많은 복을 가져다줍니다. 지혜, 건강, 재복 등 많은 행운을 불러오는데,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좋은 영향을 매우 빨리 받습니다.
운조루 터는 섬진강과 안산인 오봉산이 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좀 아쉬운 데 이 농수로가 훌륭하게 보완해줍니다. 또, 섬진강 물은 서쪽에서 흘러와 동쪽으로 빠져나가고, 농수로의 물은 반대로 동에서 서로 흐르는 것도 풍수학에선 매우 길하게 봅니다.
유이주 선생은 집터를 구입한 다음, 바로 집을 지을 계획을 세웁니다. 토목과 건축 설계는 본인이 직접 했습니다. 1776년, 설계를 마치고 토목공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선생의 신변에 큰 변화가 왔습니다.
당시 선생은 세손이었던 정조를 지지하는 세력과 가까웠는데 세손의 반대세력에 의해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습니다.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여 정조가 왕위에 올랐고, 그 얼마 후 선생은 용천부사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집을 짓기 시작하자 경사가 생겼으니 모두들 운조루 터가 특별한 명당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선생이 멀리 떠나자 양자인 유덕호 선생이 운조루 건축을 총괄했습니다. 유이주 선생은 임지로 떠나면서 양아들에게 당신이 설계한 그 대로 한 치도 착오 없이 지으라고 일렀습니다.
운조루는 그로부터 6년 뒤인 1782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 240년 동안 호남 최고의 명당 복지를 지키고 있습니다.
운조루에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많이 전해지는 데 타인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쓰인 뒤주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옛날 부잣집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로 나뉘어 있고, 아녀자들은 안채에서만 기거했습니다. 사랑채는 남자들과 남자 손님들을 위한 건물이었습니다.
양반 부잣댁 아녀자들은 바깥 활동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녀자들이 해야 할 바깥일은 노비들이 했고, 양반 여성들은 거의 집안에서 지냈습니다. 그것도 구중심처 깊숙한 안채에서 지냈으니 갇혀 사는 것처럼 답답했을 것입니다.
유이주 선생은 이런 아녀자들의 심정을 헤아려 운조루의 설계를 아주 특별하게 했습니다. 운조루에는 남자들의 사랑채와 함께 아녀자들의 사랑채도 따로 지었습니다.
동쪽에는 아녀자들의 사랑채를, 서쪽에는 남자들의 사랑채를 배치했습니다. 아녀자들의 사랑채가 있으니 아녀자들의 활동 공간이 그만큼 넓어졌습니다.
또 운조루의 안채에는 특별한 다락방이 있습니다. 2층 방의 창문을 열면 운조루 바깥 풍경이 환히 눈에 들어옵니다. 운조루 앞에 펼쳐진 드넓은 들판과 크고 작은 산들이 보입니다.
바깥출입이 어려운 아녀자들이 집안에서도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던 것입니다. 이 하나 만으로도 약자의 처지와 심정을 이해하고 존중했던 유이주 선생의 고매한 인품을 익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닥에 구들을 놓고 아궁이에서 불을 때는 우리나라의 집들은 모두 연기가 나가는 굴뚝이 있습니다. 그리고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지고 불도 잘 탑니다.
그런데 운조루에는 굴뚝이 없습니다. 구들이 끝나는 곳 건물 벽 맨 아래에 큰 구멍이 있고 여기로 연기가 배출됩니다. 연기는 바닥에서부터 흩어져 사라지니 좀 떨어진 곳에서는 연기가 안보입니다.
옛날에는 나무로 불을 때 밥을 지었습니다. 밥을 지을 때마다 굴뚝에 연기가 올라왔습니다. 부자들은 끼니때마다 밥을 지어 먹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끼니를 거를 때도 많았습니다. 식량이 떨어져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부잣집의 밥 짓는 연기를 바라보는 심정은 참 괴로웠을 것입니다.
유이주 선생은 그 참담한 심정을 헤아려 굴뚝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뒤주를 만들었습니다. 이 뒤주엔 타인능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데, 그 뜻은 `타인이 열 수 있다`입니다.
운조루에선 이 타인능해 뒤주에 곡식을 가득 채우고 먹을 양식 없는 누구나 마음대로 가져가게 했습니다. 그 덕으로 운조루 인근에는 굶는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또 양식이 떨어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욕심 내지 않고 꼭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 마을의 풍속도 매우 아름다워졌습니다.
운조루가 있는 오미리 마을의 청룡과 백호는 서로 가볍게 안아주는 형상입니다. 아주 다정한 모습으로 뻗어있습니다. 마을의 청룡 백호가 이런 모습이면, 마을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존중하며 사이좋게 지냅니다.
평화로운 마을 공동체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이런 터에다 유이주 선생처럼 지혜롭고 후덕한 인물이 함께 살며 어려운 이웃들에게 많을 덕을 베풀었으니 화목하고 평화로운 마을이 되었습니다.
유부자댁은 운조루를 세우고 여기서 살기 시작한 뒤로 가세가 점점 더 번창했습니다. 부와 명예가 증진되고 많은 행운이 따랐습니다. 재산이 늘어나는 만큼 더 큰 덕을 베푸니 갈수록 덕망이 높아지고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습니다.
유부자댁 사람들은 어려운 이들에게 곡식을 많이 나눠줘서 곳간이 비워가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고 합니다. 또, 이웃들을 적게 도와 곳간에 곡식이 많이 남아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고 합니다.
명당 복지의 빼어난 정기에다 많은 사람의 민심을 얻은 덕으로 운조루 유부자댁의 복덕은 경주 최부자댁처럼 자손 대대로 이어졌습니다. 자손들은 큰 환란을 겪지 않고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며 유복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운조루를 지켜왔습니다.
또 유부자댁의 덕행은 이웃들과 인근 마을 사람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습니다. 유부자댁이 솔선수범하여 선행을 베풀고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를 만들고자 노력한 덕에 운조루 일대 마을들은 사람 살기 좋은 곳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운조루의 명성을 듣고 운조루의 풍수 입지를 살펴보러 오는 풍수가도 많았습니다.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운조루터가 호남의 3대 명당 중 하나라 했고,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 3대 명당에 든다고 평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당이라고 극찬했습니다.
풍수가들의 이런 호평이 널리 알려지고 회자되었습니다. 유부자댁이 여러 대에 걸쳐 백여 년 동안 운조루에서 별 탈 없이 유복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운조루터가 정말 특별한 명당이라고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옛날 어느 풍수가는 운조루 일대를 답사하고 여기에 빼어난 명당 세 곳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금환낙지형, 금귀몰니형, 오보교취형, 이 세 명당이 있는데, 셋 모두 아주 훌륭한 명당이지만, 그 중에 오보교취형의 명당이 가장 좋다고 했습니다.
오보교취형이란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이 다섯 가지 보석이 모여 있는 형상의 명당입니다.
이 이야기가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세 명당 중 한 곳은 운조루터일 것이고, 나머지 두 곳은 비워진 채 남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또, 남은 명당을 찾아 거기에 살면서 자손 대대로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려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1931년, 일제 총독부에 근무하던 무라야마 지준이란 사람이 저술한 `조선의 풍수`란 책이 간행되었습니다. 무라야마는 1929년에 전국 경찰서의 도움을 받아 풍수 관련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이 책을 썼습니다.
이 책에는 명당을 찾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각지에서 운조루 일대로 이주한 집이 백여 호에 이르며 그 중엔 지체 높은 양반 부호들도 많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또, 많은 이들이 그 명당에서 살면 천운으로 쉽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고 믿는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양반 부호들이 더 큰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서 여기로 이주했지만, 꿈을 이룬 집안은 하나도 없습니다. 오히려 거의 모두 가진 재산도 많이 잃고 가세가 기울었습니다. 실망하고 다른 데로 떠난 집안도 많습니다.
운조루터처럼 정말 좋은 복지가 있다면, 그 터와 인연 닿는 이가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어쩌면 자기 가문의 부귀영화만을 바라는 이들에겐 그런 인연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조선조 말기 우리나라는 세도정치와 탐관오리의 횡포, 대지주들의 탐욕으로 백성들의 삶이 극도로 피폐해졌습니다. 또, 일제침략으로 나라를 잃고 혹독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해방 후에는 외세에 의해 나라가 둘로 나뉘었고 한겨레가 원수처럼 싸웠습니다.
이런 암울한 역사의 격동기에도 운조루와 이웃 마을 사람들은 서로 돕고 보호하며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해방 후에는 대지주의 땅을 국가에서 유상으로 수용하여 소작인들에게 유상으로 분배하는 토지개혁이 있었습니다. 이 때 유부자댁은 많은 땅을 마을 공동체에 기부했다고 합니다.
육이오 전쟁 때는 북한의 인민군 일부와 남한의 사회주의자들이 지리산에 들어왔습니다. 빨치산이라 불리운 그들과 토벌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지리산 곳곳에서 벌어졌습니다. 크고 작은 전투가 1만 회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빨치산들은 부자들의 가옥을 많이 불태워 없앴습니다. 운조루도 그런 수난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런데 인근 마을 출신 빨치산들이 유부자댁의 덕행을 알리고 적극 막아서 그 화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씨 가문의 종부와 종손이 상주하며 운조루를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운조루의 명성을 듣고 많은 분들이 방문하여 유부자댁의 미담에 큰 감동을 받고 돌아갑니다.
재물을 잘 쓰면, 사람을 살리는 영약이 되고, 아름다운 향기가 사방으로 퍼집니다. 재물을 잘못 쓰면 사람을 해치는 독이 되며 악취가 납니다. 운조루의 특별한 미담이 섬진강 지리산과 더불어 오래 오래 기억되고, 그 아름다운 향기와 선한 영향력이 멀리 멀리 번져가길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