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 c j 와 운조루 쌀독

운조루 0 34


지주 가문이 소작인들의 끼니를 긍휼히 여긴 까닭은?


씨제이(CJ)그룹이 600여명에 이르는 계약직 사원을 정규직으로 일괄 전환한다는 방안을 내놓은 건 크리스마스 이튿날인 지난 12월26일이었다.

연말연초 분위기에 거물급 인사의 타계를 비롯한 굵은 뉴스들이 이어지는 속에서도 씨제이의 잔상이 내게는 꽤 오래 남아 있었다. 그 이전 다른 기업들의 사례와 달리, 다른 직군으로 이동하는 일까지 가능하도록 했다는 의미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속에는 겉으로 드러내 보여지지 않은 다른 메커니즘이 작동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내내 떠나지 않았다.


씨제이 쪽에서 전한 이재현 그룹 회장의 배경 설명은 이랬다. “일자리 창출, 양극화 심화, 세대간 갈등 등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업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메시지를 던지는, 이른바 ‘폼’ 잡는 얘기다. 이것만이라면 씨제이의 정규직화 방안은 불안정한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이 된다. 기업 차원의 사업적 절실함과 연결되지 않은 ‘회장님’의 사회문제 관심은 지속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을 테니.


오래전 안면을 익힌 씨제이그룹의 한 임원한테 물어봤다. 거창한 명분 말고 기업 자체의 필요성은 없었는지. 답변은 비용과 편익이라는 두 갈래로 정리됐다. ‘수시로 갈아야 하는 비정규 계약직을 채용하는 데 따르는 지출이 너무 많다’는 게 하나였다. 다른 하나로 ‘기업 쪽에서 괜찮다고 판단해 계속 쓰고 싶은 사람들을 잡아두는 데 한계를 느껴 결단을 내릴 상황에 이르렀다’는 사정을 들었다. 폼나는 사회적 메시지 안에는 기업 나름의 사업적 셈법이 들어 있다는 게 씨제이만의 예는 아닐 것이다.


전남 구례에는 운조루(雲鳥樓)라는 대저택이 있다. 조선 영조 때의 무관 류이주가 세운 99칸(현존 73칸)짜리 양반가로 기록돼 있다. 앞으로는 섬진강, 뒤로는 지리산을 두르고 있는 주위 풍광만큼이나 인상적인 것은 이 저택 안에 자리잡고 있는 ‘나무 쌀독’이다.


어른 팔로 한 아름 되는 둘레에, 초등 1~2학년생 키 정도 될까 싶은 높이의 쌀독에는 한자 네 글자가 씌어 있다. ‘他人能解’(타인능해). 풀이하자면, “쌀 필요한 사람은 아무나 와서 퍼가세요”쯤 된다고 했다. 드넓은 구례 들판을 오롯이 차지한 지주 가문이, 가난한 이웃 소작인들의 끼니를 긍휼히 여긴, 이른바 지역사회 구례에 대한 폼잡기였다.


몇해 전 지리산 산행 때 운조루로 우리 일행을 이끌었던 구례 출신의 친구는 ‘타인능해 쌀독’에는 ‘부잣집의 따뜻한 인심’이라는 윤리학 이상의 정치·경제학적 의미가 담겨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취지의 설명을 곁들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서 고조된 갈등의 폭발성을 어떤 식으로든 낮추지 않고는 지주 자신의 생존마저 보장받을 수 없을 것이라는 본능적 직감, 정치학적 깨달음이 작용하지 않았겠느냐는. 소작인의 생계를 잇는 방도를 마련하지 않고는 지주의 곳간을 계속 채워나가는 게 불가능해진다는 경제학적 재생산 셈법도 작용했을 수 있고. 그래서였을까. 지리산의 빨치산 투쟁으로 상징되는 좌우 대립의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류씨 가문은 화를 입지 않고 집안을 온전히 보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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