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경제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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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손 류홍수씨 "수확한 쌀 20% 나눠줘"…99칸 대저택 6ㆍ25때도 주민들이 보호해



◆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찾아 / ① 전남 구례 문화 류씨 가문 ◆



문화 류씨 종손 류홍수 씨(56)가 가문의 종택인 운조루에서 200년 된 나무 쌀독을 열어보고 있다. 200년이 넘은 쌀독 마개 위(점선 친 부분)엔 "타인능해(他人能解ㆍ가족 외의 사람도 꺼내갈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윗부분 큰 구멍엔 원래 "ㄱ"자형 막대기가 꽂혀 있어서 왼쪽으로 열면 아래 구멍에서 쌀이 나오게 만들어졌다. <김성중 기자>  


칼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21일 전라남도 구례의 운조루.


구름 운(雲)에 새 조(鳥)를 쓰는 운조루는 `구름은 마음대로 산을 넘나들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지로 돌아가는데 나는 언제나 고향으로 돌아서 가리`라는 도연명의 시에서 이름을 따 온 문화 류씨의 고택이다.


1776년 문화 류씨 7대조인 류이주가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온 심정을 담아 지었다. 류이주는 수원성 축조를 담당할 만큼 건축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 200년이 넘은 이 고택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이 집이 진짜 유명해진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운조루와 역사를 같이한 오래된 쌀독이다.


운조루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집안의 아들들이 공부했던 수분실이 나오고 문 하나를 더 넘으면 행랑채에 어른 가슴 밑까지 오는 나무로 된 독이 눈에 들어온다. 쌀 두 가마니 반은 족히 들어갈 크기의 독 아래엔 쌀을 뺄 수 있는 마개가 있는데 마개 위에 `타인능해(他人能解:가족 외의 사람도 꺼내갈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들어와서 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부잣집에서 겨우 쌀독 하나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준 쌀의 양은 수확량의 5분의 1이나 된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 기준으로 따져봐도 대단한 양이다.


이 쌀독은 아흔아홉 칸 양반 가문, 대지주의 저택이 일제강점기와 6ㆍ25전쟁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비결이기도 하다.


운조루를 지금도 지키고 있는 류씨 집안의 장손 류홍수 씨(56)는 "6ㆍ25전쟁 때도 주민들이 앞장서 이 집만은 태워선 안 된다고 해서 집을 지킬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류씨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이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베풀며 살라` `분수를 지켜라`였다"며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나무 뒤주를 지나 안채로 들어가면 특이한 구조가 하나 더 눈에 들어온다. 굴뚝의 위치다.


집 위로 솟아야 할 굴뚝이 아래로 나 있다. 이유를 묻자 류씨는 "어려운 사람이 많은데 굴뚝 연기를 보면 더 배고파지고 힘들게 느껴지니 굴뚝을 낮게 달았다"고 말했다.


재산이 많다고 과시하기보다 어려움을 나누고 함께 살고자 한 당시 조선시대 유림의 정신은 한국 전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형을 보여준다.


우리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오만하고 과시하는 요식행위가 아닌, 같이 더불어 살아가고자 하는 삶의 방식이었다. `너보다 상위 계급이기에 좀 나눠주겠다`는 식의 행위라기보다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삶의 지혜`에 가까웠다.


김문조 고려대 교수도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단순히 상류층이 `적선하는` 것이 돼선 안 된다"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하나의 의무조항이 아니라 좋은 삶의 양식이라고 생각하는 의식이 전반적으로 퍼져야 한다"고 평가했다.


최근 한국 사회에선 돈이든 권력이든 모든 것이 노력의 결과이고 사회적 책임은 없다는 의식이 확산되고 있는데 이 같은 `개인화`는 경계해야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빈자와 부자가 서로를 인정하고 같이 살아가려는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


김 교수는 "주는 계층은 베풂에 있어 자발적 동기를 가져야 하고 수혜자들도 받는 것에 대해 당연하다기보다 자신도 언젠가 사회에 나눌 수 있다는 의식을 가져 사회적 호혜정신을 정착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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